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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하이데거 : 존재와 시간, 존재란 무엇인가

by 글랜필드 2021.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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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ㅔㅁㄱ마르틴 하이데거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하이데거는 일단 '존재와 존재자는 다르다'라는 것을 확실히 표명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존재자'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이고

존재는 그 존재자들의 '존재'이다.

 

존재

그러면 그 '존재'라는 게 뭐냐고 물어보면 그 질문이 멍청한 질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현대에 들어서까지도 꽤 많은 철학자들이 '존재'라는 것은 자명한 개념이고 거기에 대해서 더 물어봐질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그런 태도가 잘못됐고 우리는 너무 그동안 '존재자'들에 대해서 물어보고 그 존재자들의 존재가 도대체 뭐냐는 물음은 아예 던지지 조차 않았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존재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그러니까 존재자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하고 어떻게 움직이고 등등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생각을 하면서 막상 '그 존재자들이 존재한다'라는 게 도대체 뭐냐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무도 묻지 않을 수가 있냐, 그 물음의 부제가 많은 것을 은폐하고 있다고 말한다. 일단 물어봐야 관련해서 생각을 할 텐데 물음 자체를 안 던지니까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그 존재를 묻겠다'라고 표명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존재'에 대해서 도대체 어떻게 물음을 시작해야 할지 되게  난감하다고 느껴진다. 존재에 대해서 막 생각을 해보려고 해도 별로 할 말이 없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신의 존재를 바탕으로 이 세계의 사물들이나 사람의 존재의미에 대해서 설명을 해왔다. '존재는 신이 부여한 것이다'이런 식으로 말하면은 아무것도 없을 때보다는 훨씬 낫다. 근데 현대에 들어서 신이라는 게 더 이상 학문적인 영역에서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존재에 대해서 좀 다른 물음의 줄기를 찾아야 하는데 하이데거가 찾은 그 물음의 줄기는 바로 '현존재'이다. 현존재는 존재를 물음에 붙이는 존재자를 뜻한다. 그게 누구냐면 즉 우리 자신이다. 우리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과는 다르게 '존재'를 물어볼 수가 있다. 만약에 현존재가 없다면 존재를 묻는 자도 없을 거고 따라서 존재는 깊숙이 파 묻혀서 결코 드러날 수가 없을 것이다. 결국 존재라는 것이 드러나도록 하는 존재가 현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존재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출발해서 존재의 의미를 획득해 나가야 한다'라는 게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그리는 그림이다. 

 

현존재

현존재는 독일어로 'Dasein'을 번역한 말인데 독일어로 'Da'는 '거기에'라는 뜻이고 Sein은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Dasein을 직역하면 '거기에 존재'가 된다. 이 Dasein, 현존재라는 말이 우리 인간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어떤 존재냐? 우리는 이미 항상 거기에 있는 존재라는 거다. 우리는 맥락에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거다. 여기서 '거기에'라는 말이 꼭 공간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공간적인 의미도 갖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어떤 맥락 안에, 어떤 의미 안에 있음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 우리가 보통 흔히 어떻게 생각하냐면 나 자신이라는 존재자가 일단 독립적으로 있고 그 독립적인 내가 외부세계에 있는 사물들이랑 어떻게 어떻게 만나서 관련을 맺는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학문적인 상상의 순서는 '먼저 나와 다른 대상들이 따로따로 있고 그다음에 어떻게 어떻게 나와 그 대상들이 만나서 내가 그것들을 인식한다'라는 것이다. 즉 내면세계와 외부세계는 기본적으로 구별이 된다는 거다. 근데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우리는 항상 이미 여러 대상들과 만나고 있는데, 항상 나는 어떤 상황에든지 처해 있는데 왜 맥락으로부터 독립적인 내가 있다고 굳이 생각을 하냐라는 거다. '우리가 있다'라고 한다면 항상 어떤 맥락 안에, 어떤 삶 안에 있는 거지 도대체 언제 우리가 맥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거냐라는 거다. '나'라는 존재는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이미 맥락, 주변, 세계, 상황 그런 것들이 들어와 있다는 거다. 독립적인 내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서야 내가 다른 사물들이랑 관계를 맺느냐 아니면 그 사물들까지 포함된 그 상황이라는 것, 맥락이라는 것이 이미 나라는 존재 안에 포함이 되어 있느냐 그 생각의 차이인 거다. 하이데거는 후자인 거고.

 

유용성과 의미

하이데거가 보기에 특히 우리 현존재는 우선적으로 '사용의 맥락' 안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지금 의자에 앉아 있을 거고 어떤 사람은 침대에 누워 있을 거고 또 어떤 사람들은 땅을 딛고 서 있을 거다. 이렇게 우리는 항상 주변 사물들을 나에게 유용한 방향으로 사용하면서 있다. 그 어떤 것과도 사용의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순수한 우리 자신은 없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존재자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살펴보면 그 존재자들 역시도 사용의 맥락 안에서 드러난다. 눈앞에 물이 있으면 그 물은 아무런 맥락 없는 물이 아니라 내가 마실 물, 손을 씻을 물 아니면 사용하지 못할 더러운 물로써 드러난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르 들을 때도 듣기 좋은 새소리,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 아니면 뭐 그럭저럭 그냥 괜찮은 어떤 소리를 듣는 거지 아무런 맥락이 없는 순수한 잡음, 순수한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사실 오히려 굉장히 인위적인 일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이렇게 존재자들이 내 자신의 입장에서 유용성의 맥락 안에서 드러나는 현상을 가리켜서 하이데거는 이를 '의미'라고 한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물건들을 보고 그 물건들에서 어떤 의미를 읽어낸다. 우리가 아무리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처음 마주한 다고 해도 우리는 거기서부터 어떤 의미를 읽어낸다. 만약 우리가 갑자기 어떤 전혀 새로운 우주 공간으로 순간이동을 한다고 해도, 거기서도 우리는 유용함의 맥락 안에서 주변 사물들을 파악해 나갈 것이다. 내가 먹을 수 있는 것, 먹을 수 없는 것, 잠을 잘 수 있는 곳, 잠을 잘 수 없는 곳 이런 식으로 말이다. 우리가 일부러 의식적으로 구별을 하기 이전에도 이미 우리가 그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유용성의 맥락 안에서 그 세계를 파악할 것이다. 만약 그런 유용성의 맥락이 전혀 없다면 어떤 사물은 아무런 의미 없는 무언가 일 것이다. 근데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을 거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사물을 만나서 '아 이런 사물이 존재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그 사물과 관련돼 유용성의 맥락을 손에 넣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만약에 그런 맥락이 전혀 없으면 우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 사물이 없다', 그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없다'라는 것은 있어야 할 게 없어서 아쉽다 아니면 있으면 해가 될 것이 없어서 다행이다 등등하는 식으로 사용의 맥락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꼭 이런 명확히 정해진 맥락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떤 어렴풋한 맥락이라도 이미 있기 때문에 무언가가 없을 수가 있는 거다. 그 빈자리가 보일 수가 있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이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에는 단순히 순수하게 독립적으로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앞서 주어져 있는 의미와 맥락 안에서 말한다는 거다. '존재'라는 것은 이렇게 우선 사용의 의미에서 드러나게 된다. 이게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이 담고 있는 중요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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