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문필가 데이비드 흄은 철학사의 한 흐름을 대변하는 걸출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흄에 따르면, 우리는 이성보다 감정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어떤 점에서 이런 주장은 우리의 자아상을 대단히 모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흄은 우리가 이 놀라운 사실에 맞서 잘 대처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훨씬 더 평안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
흄의 철학은 독자적이고 설득력 있는 관찰 소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살면서 정말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대개 우리는 자기 마음을 가능한 한 합리적으로 단련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마음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사실에 근거해 논리적으로 추리할 수 있게 말이다. 하지만 흄은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먹든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고 딱 잘라 말한다. 우리는 의지가 비교적 덜 반영된 분석이나 논리보다 감정을 통해 동기를 부여받는 경우가 훨씬 많다. 확고한 신념이 그 사실 여부를 합리적으로 따져 본다고 해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품성이 훌륭한지 어떤지, 여가엔 뭘 할지, 성공의 요건은 무엇인지, 누구를 사귈지를 판단하거나 결정할 때, 우리가 기준으로 삼는 것은 다름 아닌 감정이다. 이성은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하지만 감정의 생생함은 결정적 요인이 된다. 흄은 그것을 정념이라고 불렀다.
흄은 소위 이성의 시대에 살았다. 많은 이들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은 합리성에 있다고 주장하던 때였다. 하지만 흄에겐 인간도 그저 동물의 일종에 불과했다. 흄은 우리의 이성적 사고가 신념으로 이어지기보다 오히려 대부분 신념에서 시작된다는 기이한 사실에 깊이 주목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 유쾌하거나 불쾌하다고 생각되면, 단지 이를 근거로 그 대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다만 이성은 처음에 취한 태도를 더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하지만 흄은 모든 감정이 무차별하게 허용될 수 있는 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는 정념을 다스리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그가 자신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더 너그러워지고, 더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한 더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도 배워야 한다. 하지만 이런 마음씨를 가르치려면, 이성보다 감정에 치중하는 교육 제도가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공공 지식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흄이 그토록 확신한 이유다.
공감을 통한 설득
당신이 누군가의 신념을 바꾸고 싶을 때, 흔한 철학 교수들이 하듯 논리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큰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 그래서 흄은 다른 전략을 제안한다. 즉, 공감이나 위로, 적절한 예시, 격려, 그가 예술이라고 부른 것을 통해 사람들의 감정을 다독이는 것이다. 오직 그런 뒤에만, 웬만큼 마음이 기운 사람들을 사실과 논리에 근거해 설득하려고 시도해야 한다고 했다.
흄의 '종교적 신념'에 관한 생각
감정이 이성에 앞선다는 생각을 주로 종교와 관련지어 논의했다. 흄은 신에 대한 믿음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즉, 신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옹호할 수 있는 설득력 있고 논리적인 논증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은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확신할 수 없다'는 입장의 온건한 불가지론과 '신은 존재하지만 나란 존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입장의 온건한 유신론 사이에서 흄은 오래 갈등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이승에서 자신을 믿지 않은 사람들을 저승에서 벌하려는 앙심을 품은 신 따위 이야기는 끔찍한 미신쯤으로 여겼다. 한마디로 흄의 생각은, 종교적 신념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에 근거해 종교적 신념을 지지하거나 반박하는 식으로는 사안의 핵심에 다가갈 수 없다. 누군가를 종교적 확신이나 불신으로 이끌려고 치밀한 논증을 들이미는 것은 흄에겐 무척 무모한 짓으로 보였다. 그가 '종교적 관용'을 앞장서 사수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종교에 관해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추리의 오류를 저지른 합리적인 자들이 아니다. 차라리 우리는 그들을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열정적 피조물로 생각하고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흄은 종교에 관해 합리적 논증을 펼치려는 시도를 무지와 오만의 극치로 여겼다.
흄의 '고정불변하는 자아'에 대한 회의
흄은 당대의 여러 상식적 사고를 진지하게 의심하는 데 몰두한 회의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흄이 의심한 것들 가운데 하나는 '자기 동일성'이라는 개념이다. 이 철학 용어는 우리가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알 수 있고, 평생 일관된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흄은 그런 '고정불변하는 자아' 개념의 기만성을 폭로했다. 그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면, "내가 나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내밀히 집중할 때 나는 늘 그 어떤 특정한 것을 지각한다. 따뜻함 혹은 차가움, 빛 혹은 그림자, 사랑 혹은 증오, 고통 혹은 즐거움, 어느 때고 '나'는 결코 지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으며, 지각하지 않고선 어떤 것도 관찰할 수 없다." 흄의 결론은, 우리가 사실상 간단명료히 정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거나 오해의 소지가 큰 '나'라는 낱말을 무심코 사용할 때, 이성이 우리에게 바로 그게 우리라고, 생각해도 좋다고 말해 주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고 말이다. 우리는 "다양한 지각의 다발 혹은 뭉치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들은 서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빨리 사슬처럼 이어져 끊임없이 지속하는 흐름과 운동 상태에 놓인다." 하지만 흄은 그 회의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상식적 신념을 대부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충분히 만족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들 덕분에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흄의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
매사에 합리적 태도로 일관하려는 것은 특별한 종류의 광기다. 흄은 데카르트를 은근히 비꼬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조금이라도 합리적이지 못한 정신의 결실은 남김없이 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흄은 우리가 믿는 어떤 것도 엄밀히 말하면,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고 반박했다. 이어서 그는,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념은 현실에서 효력을 지닌다는 이유만으로도 정당하다고 과감히 주장했다. 즉, 그것들(신념)은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해나가는 데 유용하고 유익하다. 신념에 대한 평가는 진리가 아닌, 효용(utility)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논리적 난제에 집착한다. 그것이 어떤 권위를 지녔을진 몰라도 현실에선 그리 중요치 않다. 흄은 바로 그런 집착을 바로잡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탁상공론하는 학문에 맞서 상식의 편에 선 회의주의 철학자로, 대중의 일상과 지혜의 가치를 옹호했다.
인간은 어떻게 선해질 수 있는가?
흄은 도덕 철학의 해묵은 난제에 골몰해 있었다. 그에 따르면, 도덕성은 도덕관념을 갖게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릴 때부터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통해 예절을 익히며 배양되는 것이다. 선해진다는 것은 곧 좋은 감정 습관을 들인다는 의미다. 흄은 재치와 예절, 공감과 같은 자질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다. 왜냐하면 '선'해지는 합리적 방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그런 자질을 갖춤으로써 품위 있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겉으론 합리적인데 몹시 품위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흄에겐 큰 충격이었다. 여기서 그는 다시 데카르트를 염두에 두고 있다. "당신에게는 복잡한 논증을 이해하거나 사실에 근거해 추론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당신으로 하여금 타인의 고통을 신중히 헤아리게 해 주거나, 그런 자극에 평정심을 갖고 대처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이런 자질들은 모두 우리의 감성 능력에 속한다"라고 했다. 따라서 사람들의 행동을 올바로 이끌려면, 우리는 기존 교육 방법을 반성하고 그들의 감성을 계발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딱딱하고 논리적인 훈계 대신에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해 너그러움, 온화, 동정,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흄은 당부한다.
"철학자가 돼라, 단 어디까지나 한 인간으로 남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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