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의심
데카르트는 좀 유별난 사람이었다. 그는 1596년 프랑스의 어느 귀족 집 아들로 태어나서 최상급의 교육을 받고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근데 중간에 대학교를 갑자기 그만두고 가출을 한다. 세상이라는 더 큰 책을 배우겠다면서 갑자기 여행을 떠난다. 데카르트 본인은 대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본인이 배우는 학문적 지식들이 정말로 확실한 진리가 맞는가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여행을 하다 보면 여러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데카르트는 본인이 대학생 때 가졌던 진리에 대한 의심을 더욱 증폭시키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분명히 진리로 간주됐던 어떤 사실들이나 의견들이 독일 가니까 다르고 네덜란드 가니까 다르던 것이었다. 근데 데카르트는 여기서 인류의 역사를 뒤 바꿀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그는 단지 회의주의자, 상대주의자로 남고자 했던 게 아니라 모든 회의주의와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를 찾겠다는 는 아주 원대한 목표를 세우게 된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다소 특이한 방법을 썼다. 방법적 회의라 불리는 것인데 그 특이한 방법이 데카르트를 철학적 성공으로 이끌었다.
방법적 회의
방법적 회의가 무엇이냐.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다 의심해서 어떤 불확실성도 남기지 않고 일단 자신의 모든 지식을 한번 싹 다 갈아엎자는 거다. 자신이 기존에 어떤 잘못된 판단, 잘못된 지식,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일단 그런 것들을 다 의심에 붙여 본 후에 완전하게 깨끗하게 정리된 토양에 확실하게 검증된 지식들만 모아서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지식의 체계를 건설하겠다는 게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이다.
근데 사람이라는 게 언제나 이미 익숙했던 거 이미 본인이 갖고 있던 거 그런 것들을 버리는 게 참 어려운 게 사실이다.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존재했던 전통 이미 익숙해졌던 사고방식 그런 것들을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안정적인 지휘 또 안정적인 삶 그런 것들을 포기한다는 말이기도 해서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그런데 대학교를 자퇴하고 가출 여행을 떠났던 그런 용기 있으면서도 톡톡 튀는 그런 성격의 데카르트였기 때문에 인류 지식의 판도를 뒤바꾸는 완전히 혁신적인 생각을 기존의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그렇게 진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1. 꿈의 가설
데카르트는 기본적을 감각적인 지식과 정보들을 그다지 믿을 만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감각적 지식은 완전히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질문을 던진다. "너무너무 생생해서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그런 감각도 있지 않냐?"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너무 따뜻하게 난로를 쬐고 있다. 그럼 그 따뜻함 또 그 불의 너무 생생한 움직임, 그 감각적 지식만큼은 정말 의심할 수 없는 참이 아니냐. 그렇게 묻는다. 그리고 또 스스로 반박을 제시한다. 다 꿈일 수 있다는 거다. 잘 생각해보면 모든 감각적 지식들은 다 그것이 사실 꿈인지 아닌지 가려낼 방법이 없다. 이것이 꿈의 가설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여기서 또 질문을 던진다. 아무리 꿈이라고 하더라도 그 꿈의 기본적인 요소들 일반적인 것들은 사실로서 존재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거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빵을 2개 먹었다. 근데 꿈속이라서 사실 빵이 2개가 아닐 수도 있고 또 실제로 빵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적어도 그 빵 2개라는 현상이 존재를 하려면 적어도 2라는 숫자는 참으로 존재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거다. 그러니까 아무리 꿈이라고 하더라도, 그 꿈이라도 존재하려면 어떤 꿈의 기본적인 또는 일반적인 요소들 그런 것들은 참으로써 존재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거다. 대표적으로 색, 크기, 수, 기하학적 도형, 길이 이런 것들은 정말로 참인 것들 아니냐는 거다.
2. 악령의 가설
자 그런데 이러한 생각마저 데카르트는 악령의 가설을 통해 의심해 버린다. 사악하고 강력한 악령이 존재해서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고 있을 수 있다는 거다. 사실 2+2는 5인데 4라고 속일 수도 있는 것이고 사실 2라는 숫자가 아예 없는 것일 수도 있는 거다. 색, 도형, 크기 그런 것들이 사실 다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가 그냥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게끔 악령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일 수 도 있는 거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코기토 에르고 숨
여기까지 오면 세상에 정말 확실하게 믿을 만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아마 이쯤 되면 많은 사람들은 "에이, 너무 많이 나간 거 아니냐, 그렇게 까지 의심한다고 뭐가 달라지냐 그거 쓸데없는 짓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 도 있다. 그런데 한번 우리 사회가 불확실함이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갈등과 고통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무엇이 옳으냐, 어떤 행동이 옳으냐, 무엇이 사실이냐 그런 것들에 대한 불확실함 또 의견 불일치 때문에 우리 사회와 개인이 얼마나 많이 갈등하고 방황하는지 생각해보자. 데카르트의 철학은 자신의 내면적인 성찰에만 머물려고 했던 게 절대 아니었던 거 같다. 데카르트는 사회 특히 학문 공동체가 완전하게 확실한 진리의 토대를 손에 넣음으로써 올바르고 건전하게 기능하기를 원했다. 데카르트 철학은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그 참된 가치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모든 의심 끝에 악령의 가설이라는 강력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반박될 수 없는 제1의 최상의 진리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게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인 거다. 그러니깐 아무리 악령이 나를 속이고 있다고 해도 그 속임을 받는 나는 존재한다는 거다. 아무리 내가 오류를 범한다고 해도 그 '내가' 생각함으로써 오류를 저지르는 그 '나'는 존재해야만 한다는 거다. 이 사실이 바로 제1의 확실한 진리로 세워지게 된다.
데카르트의 토대주의
데카르트는 당연히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솔직히 이걸 안다고 우리의 인생이 뭐가 달라지겠나. 데카르트는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렸다. 그 큰 그림을 '데카르트의 토대주의'라고 한다. 데카르트는 마치 수학에서 유한한 공리들로 굉장히 번잡하고 복잡한 그런 증명들을 해내듯이 "자 이제 정말로 확실한 제1의 공리가 마련이 됐다. 이제 그 위에 정말로 확실한 것들만 차근차근 쌓아 올려서 완전한 지식의 체계를 만들면 된다."라고 생각했다. 그런 데카르트의 기획이 성공했다면 그야말로 완전한 진리의 체계가 확립이 됐을 것이다. 물론 그게 그렇게 완벽하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쯤 우리는 조금 더 확실성이 가득한 세계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의 토대주의적 기획은 2가지 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서양문명의 합리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꽃피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예전보다 지식의 합리성의 스탠다드가 훨씬 더 증가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한번 다 의심해 보고 어떤 엄밀한 증명을 요구하다 보니깐 예전보다 엄밀성, 명증성에 대한 요구가 훨씬 더 증가하게 되었다. 이제는 어떠한 수학적이고 엄밀한 증거를 대고 데이터에 대한 엄밀한 분석을 수행해야만 제대로 된 지식으로 인정해주는 풍토가 생기게 되었다. 서양 근대에서 과학이 폭발적인 성장을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었다.
둘째로 데카르트의 철학은 인식주체에 대한 탐구로 철학의 방향을 전환시켰다. 예전 사람들은 신이나 이데아와 같이 외부에 어떤 진리의 근원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여기서 중심이 무엇인가? 바로 '나'이다. 내가 모든 가능한 지식의 근원이고 나의 사유가 없으면 어떠한 것도 확실하게 정립될 수 없다. 그러니까 데카르트를 거치면서 지식의 근원이 외부적 세계에서 내면적 세계로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후에 철학자들은 인간 내면에 대한 탐구에 집중하면서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우리는 지금 내가 어떤 하나의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주체라는 생각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근데 그런 주체중심적인 생각은 근본적으로 데카르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약 데카르트로 인한 주체중심적인 전환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주체로서의 내가 아니라 '가족의 일원' 또는 '국가의 일원'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리
정리하자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문구는 우리 생황과 별 관련이 없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이 과학문명을 출발시킨 사고의 표현이고 또 지금은 우리가 너무나도 익숙해진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등장시킨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다. 이 문구는 근대 이후로 발전되어 온 인간 문명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있다고 봐도 좋을 만큼 인간 지식의 판도를 뒤 바꿔 놓은 혁명적인 생각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한 문장인 것이다.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마누엘 칸트 : 정언명령 (22) | 2021.08.19 |
---|---|
데이비드 흄 :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8) | 2021.07.17 |
하이데거 : 존재와 시간, 존재란 무엇인가 (8) | 2021.07.16 |
칼 포퍼 : 과학철학, 반증주의 (12) | 2021.07.14 |
사르트르 실존주의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20) | 2021.07.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