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칸트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이 행복감이나 전통적인 종교의 추종 없이 어떻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착하고 선할 수 있는지를 해결하고자 한 철학자이다. 그는 1724년 쾨니히스베르크의 발트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그곳은 프로이센의 일부였고 지금은 칼리닌그라드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에 속해있다. 칸트의 부모는 매우 겸손했고 그의 아버지는 안장 제작자였다. 칸트는 가난했고, 50대가 되어 교수가 되기 전까지는 많은 돈을 가지지 못했으며, 그는 기꺼이 검소한 생활을 즐겼다.
그의 가족은 매우 종교적이고 엄격했다. 만년에 칸트에게는 전통적인 종교적 신념은 없었으나 종교가 그의 부모님의 삶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알았고, 사회 통합과 공동체 발전을 위해 종교가 얼마나 유용한지 알게 되었다.
칸트는 우리가 '계몽의 시대'라고 부르는 시대에 집필활동을 했다. 1784년 출간된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수필집에서 계몽시대의 특징을 식별하는 것이 세속주의의 성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적인 차원에서 기독교의 쇠퇴를 환영했지만 실용적인 차원에서 경계하기도 했다. 그는 인간 본성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우리는 모두 타락하는 경향이 있다고 믿었다. 이로 인해, 그의 평생의 프로젝트인 종교의 권위를 이성의 권위, 즉 인간의 지능으로 교체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단순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는 책에서 칸트는 그의 종교에 대한 견해를 요약했다. 그 책에서 그는 역사상 실재한 종교들이 믿은 모든 것은 틀렸지만, 그들은 도덕적 행동을 촉진시킬 필요성을 이해했고 그 필요성은 아직도 남아있다고 했다. 이 맥락에서 그 유명한 '정언명령'이 나왔다.
정언명령은 무엇인가?
첫째 정언명령
첫째 정언명령은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이다. 쉽게 말해 누구든지 어떤 행동을 할 때 스스로 생각할 때 다른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가령 길거리에서 내가 아주 작은 쓰레기 하나를 버린다고 해보자. 나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그것들을 버린다면 아주 큰 문제가 될 것이고 그 전 지구적 환경문제의 피해자는 바로 내가 될 것이다. 이렇게 다른 모든 행위를 윤리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때에 좋은 기준이 되어 준다. 또 정언명령은 우리가 관점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우리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함으로써 그 행위들의 한계점들을 알아차리게 해 준다. 만약 당신이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운다고 했을 때 당신은 그것이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정언명령을 대입한다면 당신 또한 배우자가 당신한테는 말하지 않고 다른 남자 혹은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동등하게 허락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그 불륜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참지 못할 분노와 질투심이 생길 것이다. 이렇게 정언명령은 역지사지 통해 비윤리적 행동을 억제하게 해주는 기능도 있다.
둘째 정언명령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위하라' 이 명령은 보편적 사랑에 대한 기독교 명령 즉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의 계명을 대체하기 위해 칸트에 의해 만들어졌다. 인간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인격체로서,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며 그에 합당한 존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만약 집에 수도관이 고장이 나서 수리공을 불렀다고 치자. 그렇다면 나는 이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수도관을 고치기 위해 이 사람을 도구로 이용한 것이고 이는 두 번째 정언명령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는 거다. 이에 칸트는 말한다. 그 사람을 '단지' 수단으로만 대우했을 때는 문제가 되지만 만약 그와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를 한다면 괜찮다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의 내재적 가치, 인격, 인권 등등을 그 자체로 존중을 한다면 문제가 없다는 거다. 이렇듯 칸트는 행위의 결과보다 행위의 의도,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정언명령의 절대성
정언명령은 우리의 필요나 목적에 따라서 변화할 수 있는 그런 명령이 아니라 정해져 있는 절대적인 도덕적 명령들을 뜻한다. 예를 들어서 '혼나기 싫으면 숙제를 해라.'라는 명령은 정언명령이 아니다. 왜냐하면 혼나는 것을 피하려는 목적이 조건으로 붙고 그 조건을 위해서 따라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혼나는 걸 피하려는 목적이 사라지면 숙제를 하라는 명령도 효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반면에 '약속을 지켜야 한다.'라는 명령의 경우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지켜야 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즉, 그게 도덕 법칙이라는 이유 자체만으로 지켜야 하는 명령이다. 물론 해코지를 당하지 않으려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든지 명성을 지키려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든지 여러 다른 부수적인 조건들을 내세워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의 근거들을 만들어낼 수 있겠지만, 칸트가 생각하기에 정언명령은 근본적으로 그런 모든 부수적인 조건들로부터 자유롭고 오로지 그 자체만으로도 지켜야 하는 그런 절대적인 법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이런 정언명령만이 진정한 도덕 법칙이고 이 정언명령을 지키려는 의지만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서 감옥에 가기 싫어서 사람을 죽이지 않는 건 그 자체로 선한 건 아니고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라는 정언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선한 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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