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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빅터 프랭클 : 죽음의 수용소에서

by 글랜필드 2021.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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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는 자기 자신의 삶에 있어서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유란 무엇이며 시련, 사랑 그리고 책임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현대사의 가장 잔혹했던 현장이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몸소 경험하고 분석한 빅터 프랭클의 통찰력을 볼 수 있다.

빅터 프랭클이 창안한 실존적 분석인 로고테라피는 어떠한 비극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이며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전체주의, 범결정론, 허무주의에 대한 처절한 비판이며 우리의 인생에서 아주 괴롭고 힘들 때 발견하거나 마주할 수 있는 자유주의, 개인주의, 낙관주의이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Et lux in tenebris lucet.

 

'이 모든 비극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삶이 그 자신의 잠재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하는 것'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에 의미가 있다'

 

'주어진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를 취할수 있다면 인간은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 능력을 발휘한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1)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2)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3)한 번뿐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낙관은 명령이나 지시에 의해서 강요되어지거나 과잉의도로써가 아니라 
자기주도적인 의미 찾기를 통해 스스로 행복해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

사랑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여전히 더 말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극단적을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
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나는 누군가가 -친구나 아내, 산 사람, 혹은 죽은 사람, 혹은 하나님 - 각각 다른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은 지켜보고 있는 이를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의연하고 비굴하지 않게 시련을 이겨내고,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영혼의 자유, 자기 행동의 선택권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환경의 영향이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아주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 악몽에서 조차 깨어나고 싶지 않은 가혹한 현실에서도(강제수용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내면적 자아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심리적, 육체적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유의사에 따른 결정에 있다.

시련
인간의 세계를 초월하는 또 다른 차원에서는 인간이 겪는 시련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도 있다. 영화로 예를 들자면 주인공이 영화 중간중간에 겪는 시련이나 사건들은 영화의 마지막이 돼서야 그것들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처럼 시련의 절대적인 의미를 합리적으로 터득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해야 한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수용소의 어려운 상황을 자신의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서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스피노자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도스토예프스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시련)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니체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책임감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책임감은 인간존재의 본질이다.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을 두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이런 진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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