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를 "힘에의 의지"로 대체한다.
먼저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를 조금만 살펴보자.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세계를 이끌어가는 건 '의지'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의지라는 건 '삶을 살아가게 하는 맹목적인 의지'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서 소망하는 것", 즉 "개별적인 행위에는 목적이 있지만, 전체 의욕에는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밥을 먹는 건 배고픔의 해소라는 '목적'이 있지만 어떤 이유로 배고픔을 해소시켜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은 알 수 없다. 그냥 사는 것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이 의지에 대해서 "목표와 한계"도 없고, 영원한 생성, 끝없는 흐름이 의지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삶에의 의지"이다.
그러나 니체는 "인간이 이미 '삶'을 가지고 있는데 '삶'을 원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를 비판하고 그것을 자신의 "힘에의 의지"로 대체시킨다. 그래서 그는 1882년 유고와 <차라투스트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리를 향하여 생존에의 의지라는 말을 쏘았던 자는 물론 진리를 명중시키지 못했다. 이러한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요구할 수 없으며, 이미 현존하는 것이라면 새삼 생존을 요구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삶이 있는 곳에, 그곳에 또한 의지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삶에의 의지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를 가르친다!
살아 있는 자에게 있어서는 삶 그 자체보다는 다른 많은 것이 더 높이 평가된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를 통해서 말을 하는 것이 바로 힘에의 의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제2부 자기 극복에 대하여 202p
"삶에의 의지? 그 대신에 나는 항상 단지 힘에의 의지만을 발견한다."
-(니체전집 16 / KGW VII 1, 5[1]1, 191쪽)
즉 인간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에 나오는 '자기 극복에 대하여'에서도 이런 생각이 드러난다.
"나는 생명 넘치는 자를 발견할 때마다 힘에의 의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시중드는 자의 의지에서도 주인이 되려는 의지를 발견했다. 약자는 강자를 섬겨야 한다라고 약자는 자신의 의지를 설득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기도 보다 약한 자의 지배자가 되려고 한다. 약자도 이러한 기쁨만은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제2부 자기 극복에 대하여 201p
이러한 니체의 '힘'은 유기체나 무기체, 인간이나 물리적 세계를 막론하고, 존재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이 '힘'이라는 개념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것으로 한정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권력에의 의지"로 오랫동안 번역되었던 건 히틀러와의 연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히틀러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데 사용한 <힘에의 의지>라는 책을 구상은 했었으나 출간하지는 않았다. 이건 니체가 토리노 광장에서 정신적 암흑기에 접어든 뒤에 그의 여동생이 자신이 옹호하던 히틀러를 위해서 니체의 텍스트를 짜깁기 한 뒤에 독단적으로 출간한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니체는 결코 반유대주의자, 또는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어떤 '권력'을 쟁취하려는 욕망을 말하는 게 절대 아니다. 오히려 '권력'이라는 건 '힘'을 추구할 때 자연스레 생기는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이 힘에의 의지를 "힘을 표시하려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요구"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 힘은 만족할 줄 모르는 요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상승'과 '보다 많이'를 원하게 된다. 여기에서 모든 존재는 생성(Werden) 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그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으며, 또 니체가 살아 있는 자들에게서 발견한 '힘에의 의지'가 인간을 이끌고 있다면 그는 언제나 '상승'해야 하고, 또 '보다 많이'를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자신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힘'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는 변화할 수밖에, 즉 생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니체가 존재를 '생성'으로 파악한 건 이 '힘에의 의지'라는 작용이 있는 한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생성하는 존재이다.
또한 니체는 <도덕의 계보> 2논문 18절에서 양심의 가책을 통해서 자신을 학대하며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도 "힘에의 의지" 즉 '힘을 향한 의지'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신의 본능적인 욕구를 극복함으로써 쾌락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를 극복하여 '쾌락', 즉 '힘상승'의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또 니체는 성직자가 교인들에게 '이웃 사랑'을 명함으로써 "가장 삶을 긍정하는 충동의 자극, 즉 힘에의 의지의 자극을 처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행을 함으로써 자신의 힘이 상승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의 "미학의 제1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어느 것도 아름답지 않다. 인간 외에는 : 모든 미학은 이런 단순함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미학의 제1진리이다.
여기에 곧바로 제2의 진리를 추가해보자 : 퇴락한 인간보다 더 추한 것은 없다"
-우상의 황혼 / 어느 반대시적 인간의 편력 20절
다시 말해서 힘을 추구하지 않는 인간, 자신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 인간은 추하지만, 자신을 극복하는 인간, 힘을 추구하는 인간은 언제나 아름답고 그만이 아름다운 것 만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인간이 풀 죽고 우울해질 때, 그는 '추한 것'이 근접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다. 힘에 대한 그의 느낌, 그의 힘에의 의지, 그의 용기, 그의 긍지 - 이런 것이 추한 것과 함께 사라지며, 아름다움과 함께 상승한다"
-우상의 황혼 / 어느 반대시적 인간의 편력 20절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삶 자체가 내게 비밀을 말해 주었다. 보라, 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 내가 투쟁이어야 한다는 것, 생성과 목적과 여러 목적들 간의 모순이어야 한다는 것.
아, 나의 이러한 의지를 알아차리는 자는 내 의지가 얼마나 구부러진 길을 가야 하는지도 알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제2부 자기 극복에 대하여 202p
이 힘에의 의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간이 있다. 니체는 이 인간을 '넘어서는 인간', 즉 '초인'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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