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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스토예프스키

도스토예프스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양파 한 뿌리

by 글랜필드 2021.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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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특징

인간 내면을 끝까지 파고들어 가 선과 악을 파헤친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문학 사상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작가라고 평가된다. 도스토옙스키가 직시한 것은 선과 악으로 갈라진 인간 내면의 비극성, 인간의 고통, 유한성, 인류 보편의 운명인 죽음이었다. 그의 작품들의 공통된 화두는 구원에 대한 희망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경험한 지옥

그에게 있어서 지옥은 특정 장소가 아닌 인간이 처한 상태였다. 그는 28살에 반체제 활동 혐의로 시베리아에 있는 악의 전시장인 감옥에서 10년간 유배형에 쳐해 졌다. 거기에는 강간범, 살인범, 사기꾼 등등 러시아 전역의 최악의 범죄자들 수배된 곳이었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그는 단순히 견뎌낸 것 만이 아닌 사람들을 깊이 관찰하며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지옥이란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인간 내면의 악을 발견하고 사색을 하고 기록하였고 유배지에서 돌아와서 우리말로 죽음의 집

러시아 원어로는 죽어있는 집 dead house」을 기록했다. 그곳은 살아 있으나 죽어있는 사람들이 있던 곳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시베리아의 감옥을 죽음의 집, 죽어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는가?

 

그것은 바로 욕구, 동물적인 본능, 욕망이었다. 인간이 본능적인 욕구만을 추구한다면 모여 있는 공간 자체가 지옥이다.
죄수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양심, 성찰 없이 욕구만을 추구했다. 죽음의 집은 마치 단테의 신곡의 어두운 숲에서 만난 표범, 사자, 암늑대들이 있는 추악한 동물의 왕국이었다.

 

두 번째로 도스토옙스키가 발견한 것은 증오이다. 죄수들 사이에서 증오의 대상이 된 도스토옙스키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나를 죽일 듯이 증오했다. 나를 죽일 듯이 미워했다. 기회만 있으면 나를 산 채로 잡아먹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자신도 죄수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죄수들의 악취, 음담패설, 욕설, 범죄의 추억들이 귀족이었던 도스토옙스키를 못 견디게 만들었다. 이 상호적인 증오에 대해 사색을 통해 결론을 내리게 된다. 대상이 아무리 증오스럽다 할지 라도 증오는 증오하는 사람을 증오스럽게 만든다. 자신이 이들을 증오하는 한, 인간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는 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때 이후로 증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평생을 노력한다.
증오,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를 포함한 작품들의 화두로 승화시켰다.

 

양파 한 뿌리 이야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가장 도스토옙스키적인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양파 한 뿌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 한 번도 선행을 한 적이 없는 할머니를 악마들이 불바다 속에 던져 넣었다.
->어떤 특정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라, 한 번도 선행을 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지옥에 떨어진 것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의미는 이야기 마지막에서야 알게 된다.

그때 할머니를 가엾게 여긴 수호천사가 할머니가 했던 단 하나의 선행, 할머니가 텃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뽑아 거지에게 준 것을 기억해냈다.
-> 수호천사가 할머니를 도와준 이유는 보편적인 고통에 대한 연민이었다. 아무리 사악한 사람이라도(한 번도 선행을 하지 않은 게 죄악이라면) 지옥불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 여기서는 자업자득, 인과응보,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간의 법칙은 작용하지 않는 상태이고 연민이라는 아름다운 법칙만 존재한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 양파를 들고 가서 불바다 속 그녀에게 내밀고 그녀가 알아서 붙잡고 기어 나오게 했고 양파 한 뿌리가 끊어지지 않으면 천국으로 가게 하라고 했다.
->양파 한 뿌리는 천국행 보증수표가 아니라 구원의 가능성과 신의 은총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씨앗이다.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는 이제 할머니의 행동, 결단으로 결정된다.

할머니가 양파를 붙잡고 올라가는데 그때 다른 죄인들이 할머니를 붙잡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두 가지 실수를 한다. 양파가 은총이라는 것을 모르고 물질로 보았다. 애초에 양파가 물질이라면 할머니 한 사람도 끌어올릴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양파에 작동하는 것은 물질의 법칙이 아닌 다른 법칙이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두 번째 실수는 할머니의 계산적인 마음이었다. 양파 한 뿌리의 선행으로 신과 딜을 해서 싼값으로 천국행 티켓, 은총을 샀다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하지만 신은 은총을 팔지 않는다. 신은 누구와 딜을 하지 않는다. 신은 은총을 부여할 뿐이다.

할머니는 말했다 이건 '내 양파야 너희들 것이 아니라고! 나를 구해주는 것이지 너희들을 구해주는 게 아니야.'
->할머니의 가장 심오한 죄악은 나와 너희들의 구분, 선을 긋는 단절이다. 나만 선택받았다는 생각은 교만이고, 단절, 교만을 통해 할머니의 이기주의를 보여준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서 가장 나쁜 죄악은 단절이다. 단절은 무서운 것이다. 강도 살인 등등 다른 모든 죄들의 원인은 단절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구원을 나눠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할머니의 단절된 행동을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증오가 있다. 여기에 이야기 초반에 할머니가 선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타인과 단절되어 있었고 교만했고 이기적이었고 타인을 증오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할머니를 지옥으로 가게 만든 이유였다. 

그렇다면 단절의 대안은 무엇인가? 혼자 있는 것이 단절이라면 여럿이 있는 것은 공동체일까? 혼자 있는 것이 고립, 공허라면 여럿이 있는 것은 유대, 연대일까? 죽음의 집에서 여럿이 함께 있는 고통을 견뎌냈던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에 있어서 '하나'와 '여럿'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과 전체도 반드시 대립되는 것도 아니다. 고립은 나쁜 것이고 여럿이 있으면 좋다 이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삶이라는 것을 하나로 엮어주는 어떤 것이 빠져있다면 하나가 있던 백 명이 있던 백만 명이 있던 어떤 집단이건 단체생활을 하던 협동생활을 하던 그것은 언제라도 지옥이 될 수 있다.

 

그녀가 그 말을 하자마자 양파가 끊어졌고 모두가 다 지옥 불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천사는 울면서 떠나갔다.
->공멸에 대한 생생한 묘사. 매달린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고 할머니는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 같이 잘못한 것을 보여준다. 매달린 사람들도 이건 내양파야 나만 구원받을 거야 이렇게 얘기하면서 달려들었을 것이다. 욕구 충족에 대한 열의, 증오로 가득 찾던 지옥의 사람들이었다. 개별적인 개인의 욕망 충족이 지옥이 만들어진 이유였다. 개인뿐 아니라 집단 전체가 이기주의가 될 수 있다. 흔히 한 사람을 이기주의라고 얘기 하지만 두 사람이 모여서 가족을 이루었을 때 가족이기주의가 될 수 있고 집단도 집단이기주의가 될 수 있고 심지어 국가이기주의라는 말도 나온다. 도스토옙스키가 지향했던 것은 이런 식의 집단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언제나 집산주의를 반대했다. 타 집단에 대한 증오, 배제 토대로 만들어지는 집단 이기주의에 대해 경고했다. 이것들은 절대 하나(혼자)에 대한 대안은 결코 아니었다.

 

여기서 나는 문득 마태복음 18장 19~20절 구절을 떠올렸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은 특정한 날 특정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명 이상 사람들(커뮤니티) 안에 사랑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거기에는 주님이 항상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가르침 중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민족, 계급, 인종 혹은 특정 집단이 아니라 두 명 이상의 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고 그 안에 사랑이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 이것이 주는 메시지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사랑론에 가장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 역시 단절을 멀리하고 이웃과의 사랑(예수의 이름 안에서)을 해라라고 말한 것을 되새기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증오, 이기주의를 벗어나는 방법은 즉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사랑이다. 나를 완전히 버리고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 나를 버리는데 이상하게도 나를 완전히 회복하게 되는 것 잃어버릴 뻔한 내 모습을 회복하게 되는 이유는 인간의 내면에는 악뿐 아니라 신의 모습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신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 나를 희생하면서 타인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이 사랑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완덕(完德) 완전한 덕행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실천적 사랑은 결국 '나와 너'라는 한 개념으로 요약이 된다. 모든 사람은 '나와 너'이고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나와 너 사이에 진짜 사랑, 실천적 사랑이 존재한다면 나는 비로소 나를 볼 수 있고 너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고 내 속에 비친 너를 볼 수 있다. 이 모습들은 결점으로 가득 차 있고 죄도 많이 저질렀을 것이지만 이걸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용서한다는 것이다. 겸손하게 용서할 수 있을 때 나와 너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때 '나와 너'라는 것은 이해타산, 집단 이기주의 아니면 타 집단에 대한 증오와 배제로 만들어진 '우리'의 개념 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오로지 이때의 우리 나와 너 사이의 이 우리만이 이 지옥을 천국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하나의 힘이 된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 존재한다면 무조건 사랑하라. 당신이 존재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존재하는,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 안 그러면 당신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당신이 속한 집단 존재하지 않게 된다. Dead House 죽음의 집, 죽어있는 집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오로지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인간을 존재하게 만들고 인간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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