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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알베르 카뮈

알베르 카뮈 : 이방인 해설

by 글랜필드 2021.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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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줄거리를 안 보신 분 들은 여기 링크에서 보고 오시길 바랍니다 

2021.08.12 - [분류 전체보기] - 알베르 카뮈 : 이방인 줄거리

 

알베르 카뮈 : 이방인 줄거리

줄거리를 먼저 읽으시고 해설도 읽어보세요 2021.07.01 - [문학] - 알베르 카뮈 : 이방인 해설 알베르 카뮈 : 이방인 해설 해설 유명한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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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해설

유명한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

통념상 큰 슬픔을 자아낼 것 같은 어머니의 죽음은 주인공인 뫼르소에게는 큰 충격을 주는 것 같지 않다.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뫼르소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자식은 슬퍼해야 한다'라는 사회통념적 관례에 어긋나는 행동에 사람들은 그를 '이방인'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사회가 위협당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뫼르소의 다소 감정표현이 적은 것과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귀찮아하고 '이렇든 저렇든 아무래도 의미가 없다'라고 하는 태도 때문에 그가 일종의 표류물과도 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뫼르소는 표류물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 그는 가난하고 가식이 없는 인간이며 진실에 대한 정열이 있을 뿐이다. 그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러한 그의 진실에 대한 정열은 재판장에서 아랍인을 죽인 이유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뫼르소의 재판에 대한 재판
작품에서는 뫼르소를 포함한 인간의 삶의 의미에 대해 규정하고, 가치판단을 하려고 하는 인물이 두 명 있다. 하나는 재판관이고 또 하나는 형무소 부속 사제이다. 재판관은 정부(사법부)로서 한 개인의 운명과 삶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지을려했으며, 사제는 하느님(종교)의 이름을 빌려 한 개인의 삶을 구원(당사자는 원하지 않는)하고자 했다. 결국 뫼르소는 법의 심판과 신의 심판들로 인해 삶 전체가 법정에 선 것이었다. 

하지만 뫼르소는 재판에 대한 재판을 벌였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뫼르소는 이 모든 부조리 앞에 무릎 꿇지 않았으며 그저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을 마다 하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진실이 있는 자아와 세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정복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부조리 문학
카뮈의 문학은 '부조리 문학'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부조리 문학'이란, 세상에는 어떠한 불변의 정의나 법칙이 없다는, 아니 있다 하더라도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부조리'를 보여주며 이에 주인공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허무주의적 혹은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카뮈가 이러한 작품을 하게 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를 한번 되짚어 봐야 한다. 카뮈는 1913년 알제리에서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함께 태어났다. 그다음 해, 아버지가 전투 중에 사망한다. 그리고 또래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1차 대전의 북소리를 들어며 자랐다. 그때 이후 끊임없이 살인, 부정, 혹은 폭력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자본주의, 스탈린주의, 파시즘, 나치즘, 전체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치관에 대한 회의를 하고 권력화한 이념은 부조리를 양산하기 마련이므로 훗날 아나키즘(무정부주의)적인 태도를 추구했다.

예를 들면 나치 정부 하의 국민은 국가가 규정한 규범들이 정의이자 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 참혹한 전쟁에 가담했다. 그것이 그 개인의 주관적인 삶의 의미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들과 이데올로기들이 부여하는 삶의 의미, 목적들은 그 시대, 그 국민들에게는 진리이자 삶의 의미, 목적일 수 도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삶의 의미들은 옳은 것인가?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이념이 세상의 진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존여비사상, 양반-천민 계급구조 등등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는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이 저물고 날개를 폈을 때 알 수 있다. 즉 철학은 앞날을 미리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역사적 조건이 지나간 이후에야 그 뜻이 분명해진다는 의미이다. 심지어 현대인인 우리가 지향하는 이 모든 사상과 이념들 또한 진리 또는 정의가 맞는지 모른다. 모두가 각자의 삶의 의미, 목적이 진리이고 정의라고 고집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할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카뮈는 이러한 삶에 목적, 의미, 진리 찾기 앞에서 엄청난 현실의 모순을 느낀 게 아닌가 싶다.

 

부조리한 인간(the absurd man)
그렇다면 삶은 의미가 없으므로 자살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카뮈는 말한다. 살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죽어야 할 이유도 없다. 이성적으로는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게 된 이 세상과 나 사이에 놓인 무의미의 부조리를 어떻게 떠안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만약 여기서 죽어버린다면 부조리 역시 끝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카뮈는 부조리를 끝내는 게 아닌 떠안으면서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카뮈는 부조리를 떠안고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부조리한 인간(the absurd man)이라고 불렀다. 이 부조리한 인간(the absurd man)반항적이고 자유롭고 열정적인 사람이다. 부조리를 마주할 때 그것에 반항해서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가고, 죽지 않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다 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에 자유롭고,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의식하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내는 게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삶과 시간이라는 걸 의식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밀어붙이면서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가는 열정적인 인간의 길을 카뮈는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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